^*^ 추 억/산행 및 여행

백두대간이야기

소우(小愚) 2013. 1. 23. 14:09

 

 

 

    요즘 산행을 하다보면,

    하루가 다르게 등산객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산을 통해 건강도 지키고 경치도 감상하려는 일거양득의 마음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산을 찾을 때마다 그들이 정말 산이 좋아서 산행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산행을 하는 이유는 그 산이 품고 있는 기상이나 아름다운 경치는 감상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요즘은 등산이 붐이라 할 정도로 등산객이 급증하다보니,

    그저 산을 넘는데 열중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어쨌거나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백두대간을 걷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마 몇 번인가 백두대간을 등산했음에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등산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동안,

    강원도에 있는 많은 산을 오르면서 여러 번 백두대간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았던지라,

    백두대간에 대한 궁금증이 무척이나 많았었다.

    이에 모두산악회에서 본 백두대간의 유래와 그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국토의 등뼈를 이루는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유래는,

    우리민족 고유의 성산인 백두산의 신성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백두산은 고대 단군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언제나 크고 높으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으며,

    본격적으로 숭배화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 생각된다.

 

    또한 조선 세종 때,

    두만강,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확보함에 따라

    백두산은 영토의식 성립과 함께 민족의 산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질적 내용상의 백두대간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10세기 초인 고려 승려 도선이 지은 <옥룡기>로서,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물의 근원, 나무줄기의 땅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

 

    다음으로 백두대간을 의미하는,

    대간(大幹)이라는 용어를 국내에서 최초로 사용한 문헌은, 이중환의 [택리지](1751년)로서,

    <대간은 끊어 지지 않고 옆으로 뻗었으며 남쪽으로 수 천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에 까지 통하여 하나의 맥령(脈嶺)을 이루었다.>라고 표현했다.

 

    백두대간과 백두정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문헌은,

    이익의 [성호사설](1760년)로서 백두산을 우리나라의 조종산이며 대간의 시작 산으로 보았으며,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산맥상황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백두대간을 체계화한 것은,

    1770년경(영조)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로서 백두대간에 대해서 그 용어뿐만 아니라,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연결의 상태, 관계, 순서를 알기 쉽도록 일목요연하게 표로 제시 하였다.

    다만 산경표의 저자나 제작시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도 있다.

 

    산림청에서는,

    ['96 백두대간 연구용역] 결과보고서에 의거 여암의 저서로 추정하여 작성하였다.

    (여암이 지은 [산수고]에 산경의 내용이 있고,

    이 저술과 거의 동시기에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여 신경준이라고 보게 되었다.)

 

    백두산에서 남으로 맥을 뻗어,

    낭림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산의 큰 줄기를 망라한 산맥이다.

 

    즉 한반도 산계의 중심이며,

    국토를 상징하는 산줄기로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있다.

 

    <산경표>에 의하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大幹), 1개 정간(正幹), 13개 정맥(正脈)의 체계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선의 굵기 차이로 산맥의 규모를 표시하였다.

 

    제일 굵은 것은 대간,

    2번째는 정맥, 3번째는 지맥,

    기타는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구분하여 나타냈다.

    정맥과 정간의 차이는 산줄기에 큰 강의 동반여부에 따라,

    강이 있으면 정맥, 없으면 정간으로 구분하였다.

 

    백두대간을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마천령, 낭림, 부전령, 태백, 소백 산맥을 모두 합친 산맥이 된다.

    근대적 산맥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지질학자 고토가 14개월 동안 한반도를 둘러보고 난 후,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란 글에 한반도의 산맥을 발표한 데서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지질학적 관점에서 도출된 산맥이며,

    해발고도라든가 교통이나 물자교류 등,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산줄기의 존재에 대한 관점은 결여되어 있다.

 

    산이 높고 봉우리가 조밀한 줄기가 산맥으로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산맥으로서 잘 드러나지 않는 낮은 구릉이 지질구조 때문에 산맥으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

    산맥의 연결성을 살피는 데는 전통적 산맥체계가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 고유의 산에 대한 관념과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며,

    두만강, 압록강, 한강, 낙동강 등을 포함한 한반도의 많은 수계의 발원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 되는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이기도 하다.

 

    산을 생명이 있는 나무에 비유하여,

    큰 줄기와 작은 가지를 나누어 국토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망하는 시각은,

    풍수적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한국 지기의 발원처는 백두산이며,

    백두대간을 타고 내린 기가 정맥을 타고 다시 나누어지고

    각 정맥들에 맥을 댄 지맥들에 의해 바로 우리들의 삶이 어우러지는 마을과 도시로 지기가 전달된다.

    그래서 전 국토는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풍수의 기본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때 선승(禪僧)이며,

    한반도 풍수지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도선 국사도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마치니,

    그 세는 수(水)를 근본으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다>라고 하여,

    일찍이 백두대간을 국토의 뼈대로 파악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지질학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외세에 의해 붙여진 산맥 이름보다 백두대간적인 산맥 인식의 중요성은,

    그것이 국토의 고유성과 유구한 생명력, 사람과 자연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유기체적 산맥관으로써,

    우리의 지리관·산맥관에 뿌리를 둔 한국적 산맥론의 표상이다.                                                                                                                                        

     (발췌 : 모두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