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여행
◇ 일시 : 2025년 04/06~04/08
◇ 여행지 및 여정
1. 1일차(04/07)
1) 남산등산(07:00~11:40)
2) 문무대왕릉(13:30~14:00)
3) 주상절리조망타워와 산책로(14:20~14:50~청와삼대 점심~15:40~16:00)
4) 전촌용굴(16:25~16:35)-산책로정비
5) 감은사삼층석탑(16:50~17:00)-쌍탑 중 1기 수리공사
6) 동궁과 월지(17:55~19:00)
7) 월정교(19:15~20:00)
8) 첨성대(20:10~20:15)
9) 신라대종(20:30)
10) 황리단길 야경(20:35~19:50)-반듯이(저녁, 20:54~21:34)
11) 숙소(GG호텔)
2. 2일차(04/08)
1) 경북천년숲정원(07:30~09:10)
2) 포석정(09:20~10:00)
3) 선덕여왕릉-사천왕사지(10:20~10:50)-산해(점심)
4) 불국사(12:00~14:20)
5) 월성-석빙고(14:45~15:20)
6) 대릉원(15:35~16:10)-소화염전(소금빵)-경주동(저녁)-경주역
7) 경주역출발(18:50)-강릉도착(22:50)
1. 경주남산등산(07:00~11:50)
천년고도 경주는,
신라 형성기부터 통일신라-후삼국시대에 이어지는,
약 사백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품은 도시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슷한 부족국가로 출발 지배계층을 형성하기 위한,
독특한 골품제도가 사회와 문화전반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경주는,
예전부터 꼭 다시 한번 오고 싶은 곳이다.
경주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불국사와 석굴암, 포석정,
그리고 첨성대와 대릉원(천마총), 보문단지를 다녀온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가고 싶은 장소는,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자 불교유적의 보고인 남산등산이다.
경주남산등산 후에는,
세월이 빗어낸 불교문화와 역사유적을 직접 견학해보고 싶다.
그래서 보다 많은 곳을 둘러보기 위해 자가용을 몰고 경주를 방문했다.
여행 중에 꼭 봐야할 문화유적 뿐만 아니라 그 근처의 볼거리도 함께 들릴 예정이다.
아마 여유로운 여행보다 꽤 바뿐 여행이 될 듯싶다.
하지만 모처럼
아내와 딸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여행지를 돌면서 맛집과 봄꽃들의 축제를 보고 맛볼 계획이다.
그래서 절약보다는 먹고 싶고 가고 싶은 곳 위주로,
난 그저 기사와 보호자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여행일정은,
6일 주일 교회행사를 마치고 저녁에 출발하여,
예약한 경주GG호텔에서 1박 후. 아침 일찍 경주남산에 등산하기로 했다.
오후 5시에 출발, 근덕IC에서 진출-7번국도-경주GG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9시이다.
숙소는 너무니 깨끗하고 마음에 든다.
새벽같이,
서남산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벚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어제 경주시내로 들어오면서 보던 벚꽃을 오늘 제대로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길 뿐만아니라 여행지로 이동하는 도로나,
여행지 곳곳마다 만개한 벚꽃이 나를 반겼다.
강릉도 벚꽃으로 유명시를 타는 곳인데 경주와 비교할 바 아니다.
경주남산은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오늘의 등산코스는,
서남산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이곳의 깃대종인 소나무숲을 지나면 삼릉 옆으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산행코스는 서남산주차장-삼릉탐방지원센타-삼릉-상선암-바둑바위-
금오봉-용장사곡삼층석탑-용장사지-용장골지킴터로 하산하여,
용장마을을 경유 마을버스나 텍시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경주국립공원인 남산은,
위아래로 8㎞, 좌우로 4㎞ 정도 되는 타원형의 산이다.
이 산에는 무려 절터가 147개, 석불이 119체, 석탑 96기, 석등 22기,
그리고 성곽이 4곳, 왕릉이 13개소 등, 이 산 전체를 문화제라 할 수 있다.
멋진 경치와 문화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도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고 한다.
등산 중 노란색 이정표는,
문화제를 알려주는 이정표라고 하니 참조했으면 좋겠다.
이처럼 경주남산에는,
수많은 문화제가 있으나 오늘 등산에서 만나는 문화제만 소개하기로 한다.
등산 중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문화제는 삼릉이다.
깃대종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삼릉은,
남산 서쪽에 동서로 세 왕릉이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서쪽으로부터,
아달라왕(18대), 신덕왕(53대),
경명왕(54대) 등, 박씨 3왕의 능이다.
이어서 만난 문화제는,
삼릉계 제1사지에서 발견된 석재유물이다.
그리고 이어서 삼릉계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마애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전성기 때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되고,
마애관음보살은 높이 1.5m로 계곡의 큰 바위 앞부분을,
쪼아내어 부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애상은,
전체 윤곽은 광배로 마무리되어 있고,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서 정병을 들은 모습이다.
등산로를 잠시 오르면 두 바위면에 새겨진 선각육존불을 만날 수 있다.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통일신라시대 선각육존불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삼층석탑터가 자리한 방향으로,
삼층석탑터와 석조여래좌상, 마애선각여래좌상,,
그리고 석조여래약사좌상 등, 총 3곳에 불상을 모신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석조여래약사좌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선각육존불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중턱에 1980년 보물로 지정된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얼굴 부분은 위로 반만 남아 있고, 옷주름은 가늘고 몸 부분은 풍부하다.
불상의 머리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상투 모양의 큰 육계가 있다.
이 불상 뒤쪽에는 선각여래좌상이 있다.
약 90m 떨어진 거리 높이 10m의 바위면 중간에 새겨져 있다.
불상의 얼굴과 손, 그리고 상체의 옷자락 부분은 얕게 돋을새김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선으로 새겼으며, 균열 틈 위쪽에 부처의 몸을 새기고,
균열의 아래쪽에 연꽃 모양의 대좌를 새긴 모습이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조망이 시원하다.
앞쩍으로 경주시와 벽도산과 선도산이 나란히 보인다.
다소 가파른 이 길을 잠시 오르면 처음으로 상선암이 나온다.
상선암은 정상부 아래 불상을 모신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는 작은 암자로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계곡 상류 절벽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암자 위쪽에는,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다.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서 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높이 5.2m, 무릎너비 3.5m로서 굳센 기상과 단정한 모습을 담은 뛰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등산로는 보호지역으로 통제되어,
새로 난 등산로에서는 볼 수 없어 아쉽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6m에 달하며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등산로를 따라가다 마당바위를 지나 돌아가면 이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보이지만,
아무리 시력이 뛰어나도 불상을 감상하기는 어렵다.
상선암에 이르자,
가장 먼저 반겨주는 풍경은 하얗게 핀 벚나무 고목이다.
묘하게 상선암의 허름함을 가려주는 느낌이다.
상선암은 원래 있었던 사찰인지는 모르지만 삼릉계곡 정상부 아래에 있다.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불상을 모신 불전과 작은 요사채의 아담한 사찰이다.
진달래는 사진을 찍어보면,
꽃의 아름다움에 비해 비교적 사진이 선명하지 않은 꽃인데,
오늘은 그 꽃의 매력에 너무나 흠뻑 취했다.
상선암 테크계단을 지나서 새로 난 등산로를 비스듬이 오르면 조망지가 나온다.
잠시 경주시내 풍경을 감상하고 능선을 따라가면 바둑바위가 나온다.
바둑바위는 조망지에 가깝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자리한 정상부가 바로 바둑바위다.
마치 넓은 바위에 바둑판을 두고 마주앉은 신선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발아래로는 경주벌판과 시가지가, 맞은 편으로는 산줄기가 시원하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빨간우체통이 특이하다.
다시 활엽수림을 지나,
암봉에 서면 발아래로 삼릉계곡과 상선암 전경이 보인다.
그리고 돌아보면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가 건너다 보인다.
이곳 암릉지대에는 바위틈으로 자란 진달래 분홍 꽃잎이 유난히 도두라저 보인다.
잠시 등산객의 도움으로 부부사진을 찍고 금오봉으로 향했다.
금오봉은,
해발 468m로 활엽수림에 둘러싸여 있다.
마침 정상에서 쉬고 있는 등산객의 도움으로 인증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용장마을로 하산하는 길은, 정상아래의 넓은 길을 따라가는 길과,
정상에서 직진하는 길이 있지만, 두 길 모두 만난다고 한다.
용장마을갈림길은,
약 10여분 걸으면 이정표에서 우측방향이다.
이내 테크내리막계단과 조망바위가 보이고 눈앞으로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잠시 풍경에 취한 뒤 테크계단을 내려가면 탑부재가 나오고,
그곳에서 다시 우측으로 내려가면 용장사곡의 백미인 삼층석탑이다.
경주 남산용장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유가종사찰로 고승이 대현이 거주하던 곳이다.
용장사지는 바로 이 사찰의 영역으로 용장사곡 전체를 일컫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도 김시습이 이 절에 기거하면서 썼다고 한다.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마애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룬 보물들이 즐비하다.
용장사곡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높이 4.42m.
경주 남산 서쪽의 용장사가 자리하였던 골짜기 정상 부근에 있다.
2층 받침돌의 아래층 받침으로 자연암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이 석탑은 일찍이 무너져 있던 것을 1922년에 지금처럼 다시 세웠다.
이 석탑은,
바위 위에 세운,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대표적인 석탑이다
용장사지 마애석불좌상은,
긴장하고 활력에 찬 형태, 유려하고 세련된 선의 흐름,
깔끔한 부조의 아름다움 등, 8세기 중엽의 사실주의 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석탑은,
보면 볼수록 신비하다.
아래에서 올라다보면 푸른 하늘 끝에 닿아있는 듯하다.
삼면이 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경과 조화를 이뤄 마치 불국에 있는 기분이다.
석탑아래 자리한 소나무와 바위틈에서 핀 진달래조차 아름답다.
나도 몰래 바위에 참선하듯 앉아 머물렀다.
바위 옆,
테크계단을 돌아나가자,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과 얼굴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보인다.
마애여래좌상은 남산 용장사터 바위면에 새겨진 불상으로,
보물 제186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을 겹겹이 새겼고,
정수리의 뼈가 머리 위로 솟아 상투처럼 보이는 육계는,
크고 펑퍼짐하게 표현했다.
눈코입이,
뚜렷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보인다.
옷 주름은 평행선을 빼곡하게 그려놓았고,
무릎 위에 놓인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해 있고,
왼손은 배쪽에 놓여 있으며, 왼쪽 어깨 바깥부분에,
태평 2년 8개월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977년 1022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연이어,
보이는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 187호로, 조각도 우수하지만 불상을 받치는 대좌가 독특하다.
자연암반위에 원반모양의 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대좌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다.
그 위의,
불상은 머리는 잃었지만,
왼쪽 어깨 위에 가사와 끈과 매듭이 새겨져있다.
1920년 용장사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었다.
잠시 내려가다보면,
탑의 기간덮개돌과 지붕돌이 있는 탑부재가 나오고,
우측으로 돌아나가면 죽림 사이에 호젓하게 자리한 용장사 제1사지가 있다.
그리고 죽림을 벗어나면 돌을 오목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돌확을 만날 수 있다.
정상갈림길에서 시작돤 험한 급경사길은 이곳에서 끝이다.
주변을 돌아 얼마간 걷노라면,
다리의 이름조차 아름다운 설잠교가 나온다.
설잠(雪岑)은 김시습의 법호로 그가 산승으로 머물면서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로,
북향화(北向花)를 심은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다리이다.
특히 오늘 이 다리가 내마음에 와 닿는 것은 그와 동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내려가면,
고위봉갈림길과 만나고 잠시 후면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는 계곡이다.
너무나 말고 투명해 손을 담그니 마치 얼음물에 넣은 듯 시원하다.
잠시 계곡에 내려가 급경사를 내려오느라 지친 손과 발을 씻고 세수도 곁들였다.
아직도 용장마을까지는 1.35㎞, 갈길이 바쁘다.
용장골지킴이센터에 이르자 출렁다기가 보인다.
그곳 관리인에게 서남산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문의하니,
약 10여분 용장마을로 내려가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나 버스를 이용하라고 알려준다.
마을도로를 따라가면서 보이는 용장마을은 부촌인지 집집마다 정원이 아름답다.
버스정류장은 용장유료주차장 옆이다.
마을버스는 약 3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 오기를 기다리는데 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약 20분 후면 도착한다는데 주차장으로 돌아가 경주역까지 이동하려니 바쁘다.
다행히 빈택시가 와 택시로 주차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경주역으로 이동했다.
경주역에서 딸과 만나,
숙소에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경주여행을 시작하려 했는데,
그만 경주역 앞 도로에서 직진해야하는데 우측으로 진입하여 멀리 돌아가게 되었다.
다시 경주시내로 진입하여 돌아오는데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문무왕릉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결국 옷은 포기하고 문무왕릉으로 향했다.
2. 문무대왕릉(13:30~14:00)
약 30여분을 달려,
문무왕릉조차장에 도착했다.
예전 TV에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해안으로 무속인들이 넘쳐난다는데,
다행히 오늘 와 본 해안에는 그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생각보다 요란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까마귀와 갈메기조차 날지 못할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문무왕이 죽자 유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그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로 사방으로 물길을 터놓았다.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82년 감은사를 지어,
불력에 의해 왜구를 막으려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의 금당 아래를 깎아 동해로 구멍을 내어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애국애민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게 해준다.
3. 주상절리조망타워와 산책로(14:20~14:50~
청와삼대 점심-15:40~16:00)
주상절리 조망타워는,
경북 경주에 있는 주상절리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조망타워는 2천235㎡ 땅에 4층 규모이다.
1층을 사무실과 전시실로 활용하고 2∼4층을 전망 공간이다.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하서리 1.7㎞에 산책로 파도소리길을 만들었다.
주상절리는,
용암 냉각 수축작용으로 틈(절리)이 수직으로 세워진 형태를 말한다.
양남 주상절리는 천연기념물 536호로 수직, 수평, 부채꼴 등 ,
다양한 주상절리가 한자리에 모인 특이한 형태로,
학술 가치가 높다.
이곳도,
문무대왕릉 해안과 마찬가지로,
바람이 너무 거세 모자가 날아갈 정도라 다소 아쉽다.
그래서 조망타워를 중심으로 보이는 곳까지 양쪽을 돌아봤다.
상상했던 것보다 다양한 형태의 주장절리들이 산재되어 있어 볼만 했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파,
딸이 미리 찾아 놓은 이곳의 맛집인 청와삼대로 향했다.
청와삼대는 경와대에서 조리한 경험이 있는,
세프가 직접 요리하는 곳이라 한다.
청와삼대는,
조망타워가 내려다보이는 도로 변에 있다.
청와대에서 먹었다던 칼국수와 보쌈을 주문했다.
내온 반찬과 음식의 맛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정갈한 분위기와 친절한 응대가 즐겁다.
서빙하던 아주머니께서,
출렁다리를 건너봤냐고 물으셨다.
금시초문이라, 출렁다리 방향을 물어보니,
출렁다리 좌측 산책로을 걷다보면 등대가 보이는 곳에 있다고 한다.
아마 세찬바람 때문에 포기했던 산책로상에 있었나 보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출렁다리를 보기 위해 좌측 산책로를 따라 걸어갔다.
출렁다리에서 보이는 주상절리와 등대가 있는 해안 풍경은 아름답다.
비교적 짧은 출렁다리지만 출렁거리도 좋다.
빼놓지 않아야 할 명소이다.
4) 전촌용굴(16:25~16:35)-산책로정비
천천동굴은,
작은 항구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경주해파랑길 양남파도소리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천촌동굴은 경주 감포의 파도와 시간이 만들어 낸 자연조각품인 해식동굴 용굴로,
전촌항 인근의 해안가에서 만날 수 있다.
사용굴과 단용굴 두 곳이 있는데,
사용굴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마리의 용이 살았고,
단용굴에는 감포마을을 지키는 용이 살았다는 용에 대한 설화가 전해진다.
이곳은 감포까치길 제1, 8구간의 경유지이고 최근까지 군사작전지역을 ㅗ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파랑길이 조성되면서 일반인에게 포토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나 역시 그 소문에 따라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오는 날이 장날이라 산책로정비공사로 갈 수 없었다.
멀리서 어렵게 찾아온 곳인데 미리 공지되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말이다.
우리 일행분만 아니라 꽤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걸로 보아 경주관광행정이 아쉽다.
특히 덤프차와 청소차의 난폭운전이나 크게 울리는 경적소리는 귀에 거스린다.
5) 감은사삼층석탑(16:50~17:00)-
쌍탑 중 1기 수리공사
감은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사찰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창건하였다.
682년(신문왕 2)에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성전사원으로 기능하였다.
현재는 동서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창건한 기록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부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승려 지의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이때 건립된 금당 섬돌 아래에,
용이 들어와 서리고 있을 수 있도록 구멍을 하나 두었고,
사찰을 감은사라 하고 문무왕의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였다.
감은사 동서삼층석탑은,
고대 쌍탑 가람 배치의 전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 두 탑에서 발견된 사리 장엄구는 석탑 내에서 일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사리 장엄구의 구성과 사리 봉안 방식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 탑들은 감은사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제일 윗부분인 찰주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의 삼층 석탑, 나원리 오층 석탑 등과 함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탑파 양식을 따르고 있다.
쌍탑 중 서 삼층 석탑에서,
왕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1996년 동 삼층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 삼층 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각각 국보 366호 및 보물 1359호로 지정되었다.
감은사지는,
돌아가는 길에 있어 잠시 들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쌍탑 중 한기는 덮개로 덥혀 있다
아쉬운 마음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 혼자 잠시 감은사지를 돌아보았다.
다음여행지는 동궁과 월지라 밤과 낮 풍경을 함게 보고 싶어 서둘러 경주시내로 출발했다.
6) 동궁과 월지(17:55~19:00)
동궁은,
통일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나라의 경사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라 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연못이 바로 월지인데,
조선 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연못과 어우러진 누각의 풍경이 아름답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에 비친 야경이 더욱 유명하다.
서둘러 왔음에도,
넓은 주차장은 물론이고 동궁과 월지에도 만원이다.
이곳 벚꽃은 이미 때가 늦었는지 많이 낙화되어 벚꽃 핀 풍경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아내와 딸은 이미 와본 곳이라 나혼자 서둘러 한바퀴 돌면서 풍경을 담았다.
그리고 일행과 합류하여 야경명소에서 야경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6시 44분,
동궁과 월지는 물론이고 주변 숲에도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월지의 물속으로 동궁과 숲 그림자가 몽환적으로 변해갔다.
야경사진을 찍느라 월지 주면을 가득 채운 방문객들의 숨소리조차 고요하다.
왜 이곳이 경주의 야경명소인지 깨닫게 된다.
7) 월정교(19:15~20:00)
월정교는,
경주시 교동 163-1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교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진 것으로 ,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효대사도 걸었던 곳이라 한다.
현재의 월정교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길이 66.15m, 폭 13m, 높이 6m의 복원된 교량이다.
문루 2층에는 출토된 유물과 월정교의 역사와 복원 과정 관련 영상도 상영한다.
월정교 입구 현판은 최치원, 출구현판은 김생의 글씨라 한다.
월정교야경은,
동궁과 월지와 더불어 경주의 야경명소이다.
그 명성과 걸맞게 다리의 야경뿐만 아니라 산책로야경 역시 아름답다.
특히 징검다리에서 바라보는 물에 비친 월정교는 환상적이다.
그 풍경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사실,
경주시내 여행은,
차를 이용하기보다 도보여행에 적합하다.
곳곳이 릉이요 문화재라,
여행지 가까운 곳에 주차 후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황리단길이나 대릉원,
첨성대가 자리한 곳은 거의 붙여있어,
차로 이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저녁식사를 위해 우린 신라대종이 있는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이동했다.
가는 길에 조명이 들어온 대릉원과 첨성대도 보인다.
8) 첨성대(20:10~20:15)
경주 첨성대는,
수학여행 당시 이미 본 것이라,
오늘은 황리단길 야경을 보는 길에서 잠시 보았다.
조명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첨성대와 벛꽃이 은근하다.
이곳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의 천문 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라고 한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남동쪽으로 창이 나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나와 있다.
이것은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는데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다.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관계가 깊다.
9) 신라대종(20:30)
신라대종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재현한 것이다.
높이는 3.66m, 평균 두께가 23.30㎝, 무게는 무려 20.17톤이다.
신라 경덕왕 때 만들기 시작하여 혜경왕에 이르러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은,
1,200년 동안 서라벌의 아침을 깨웠고, 저녁의 고단함을 달래고 위로했을 것이다.
10) 황리단길 야경(20:35~19:50)-
반듯이(저녁, 20:54~21:34)
황리단길은,
황남동의 경리단길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낡은 옛 건물에 한옥으로 생긴 식당과 커피점, 사진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유명해졌다.
특히 소금빵 등 특이한 맛집이 많고,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가게들이 즐비해,
젊은이들의 유동 인구가 아주 많다.
우리 일행 역시,
황리단길 근처에 숙소가 있어,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즐겨 들렸던 곳이다.
여행 첫날인 오늘도 저녁을 먹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너무 늦은 듯하다.
덕분에 난 황리단길 골목골목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밤 9시가 가까워서야,
우리 일행은 아직 문을 연 반듯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문을 닫을 시간이지만 손님이 계속 찾아드니 어쩔 수 없이 받는 듯하다.
덕분에 갈비찜과 튀김세트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숙소인 GG호텔로 돌아왔다.
2. 2일차(04/08)
1) 경북천년숲정원(07:30~09:10)
2일차 첫 여행지는 경북천년숲정원이다.
이 정원의 이용은 무료라 일찍 와도 입장이 가능해 먼저 이곳을 찾았다.
시내에서 대략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이곳은 진입도로 양쪽으로 소나무가 가지런하다.
진입도로는 아직 막혀있지만 차단가로막 옆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원 안에는 벌써 새벽운동을 나왔는지 몇분이 걷고 있다.
경북천년숲정원은,
본래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었다.
경주 동남산 기슭에 자리한 이곳은 산림환경을 조사하고,
천연기념물 후계목의 증식과 보존, 산림 보호를 위한 연구 기관이었다.
국내 5번째 지방 정원이고 경북에서는 1호이다.
도로를 기준으로,
서쪽은 경북 산림 환경연구원이 있고,
동쪽으로 숲과 오솔길, 개울과 정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제일 먼저 거울 숲을 만난다.
외나무다리에 서면 맑은 실개천에 그 모습이 거울처럼 비친다하여 거울숲이다.
거울공원 반대편에는 무궁화정원이 있고,
이어서 분재원과 암석으로 조성된 정원과 구름폭포, 바닥분수가 있는 서라벌 정원,
마지막으로 수양버들 못 정원을 지나 산책로를 따라 걷다 돌아서면,
파란 하늘 가득 높다란 포풀러나무 숲길이 이어지고,
관리사무실과 잔디광장 사이로 황토벗나무길이 아름답다.
아직 나무에 새싹이 돋지 않았지만,
각 구역별로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식재되어 있어 ,
각기 다른 공간적 특징을 지니며 계절에 따른 변화도 즐길 수 있다.
식물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안내문도 있어 아이들의 산림교육에도 적합하다.
이곳 숲정원 방문은 아마 여름이나 가을풍경이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싶다.
2) 포석정(09:20~10:00)
사적 제1호.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에,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고 기록으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경주 서쪽 이궁원에서 유상곡수라는 시회를 위해 만든 것이다.,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에 물이 흐르게 하고,
시회에 참석한 사람이 포석을 따라 빙둘러 앉아 잔을 포석의 흐르는 물 아래 띄우고 ,
물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시킨다.
시를 짓는 사람은,
잔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전에 시를 지어 잔을 들고 시를 읊는다.
그 후 다른 사람에게 잔을 띄워 보낸다.
잔이 돌아오기 전에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나 벌칙을 받는다.
포석(砲石)은,
시회의 놀이를 위한 장치이자 조경의 역할을 한다.
발굴 조사 도중 포석이라 쓰인 와당(기와)이 발견되기도 했다.
수학여행 당시에는 포석정에 물이 흐르고 잔도 있었는데,
다시 찾은 포석정에는 낙엽만 가득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3) 선덕여왕릉-사천왕사지(10:20~10:50)-
산해(점심, 11:05~11:35)
불국사로 가는 길에 ,
선덕여왕릉 이정표가 보인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첫 여성 군주라는 기억이 나서 들려보기로 했다.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분황사를 창건하였고, 특히 첨성대, 황룡사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쓴 왕이다.
선덕여왕릉은,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무덤의 지름은 23.6m, 높이는 6.8m이다.
선덕여왕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 위에 있는 산이기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은 ,
도리천은 낭산의 산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이곳 낭산의 신유림 정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호국신인 사천왕을 모시자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천왕이 있는 곳을 사왕천이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도리천이라 한다.
이로써 낭산 정상이 도리천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선덕여왕릉은,
찾아가는 길이 조금 어렵다.
이정표에서 사천왕사터 아래 길로 진입하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사천왕지터를 올라 잠시 돌아보고 우측 송림이 보이는 철조망 사잇길을,
지나면 송림사이로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능으로 가는 송림길은,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소나무길이다.
숲 사이로 테크계단이 있지만 제 멋대로 자란 소나무는 천연스럽다.
선덕여왕릉 역시 릉이라하기에는 다소 작고 초라하다.
경주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 정돈된 대릉원의 릉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선덕여왕르을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청국장과 석쇠갈비 맛집 산해에 들렸다.
청국장은 간이 심심하지만 맛이 있었고 신선한 야채와 곁들인 양념갈비도 맛있다.
어느새 꽉 찬 사람들과 함께 먹으니 더 좋았다.
4) 불국사(12:00~14:20)
불국사로 이동하는 길은,
만개한 벚꽃들이 마지막 발버둥을 치는지,
바람에 꽃비가 내리듯 벚꽃이 흩날리고 불은색이 감도는 벚꽃향기가 그윽하다.
가는 내내 동영상을 찍느라 여닫는 차창가로 그 향기가 그윽하다.
불국사공영주차장에 주차후 계단으로 불국사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서자,
마치 설원에 온 듯 하얀 꽃비가 내린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인 듯 드넓은 벚꽃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벚꽃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하트몽양 손짓으로 자신만의 포즈로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불국사의,
풍경을 담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청운교 백운교는 물론이고, 극락전 현판 뒤에 있는 맷돼지나, 정면의 금돼지 등
유명세를 타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그나마 사람들이 덜 나오게 사진을 짝을 수 있다.
불국사 정문을 지나,
해탈교를 건너면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이 나오고,
천왕문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불국사 탐방이 시작된다.
찬란했던 신라의 역사와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견학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불국이다.
신라인이 그리던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옮겨놓은 것이다.
불국사는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리고 751년 경덕왕 때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그리고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놓았다.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극락전을 향하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연화교와 칠보교,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다.
청운교, 백운교는,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 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운교, 백운교의 33계단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을 정화하여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면 자하문이다.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이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자하문의 좌우의 동서회랑은,
대웅전의 옆문과 통하게 되어있는데,
참배객은 최초의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문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나가게 된다.
이어서 ,
수미범종각이라 불리는 범영루와,
경전을 보관하던 좌경루가 보인다.
그리고 1962년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인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이 두 탑은 불국사의 사상 및 예술의 정수이다.
이 탑은,
법화경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으로,
영원한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
이곳에 상주한다는 깊은 상징성을 가진 탑으로서,
불교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시키고자 노력한 신라 민족혼의 결정이기도 하다.
석가탑 내에서,
발견된 유물인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를 모신 곳이다.
1765년(영조 41)에 중창하였지만, 그 초석과 석단 등은,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웅전 안의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 위에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무설전은,
불국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만들어진 건물로,
법화경을 비롯한 불경을 강론하던 장소이다..
무설전이라 이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이나 불교의 오의가,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입구에서,
연화교,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안양문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26년(인조 4)과 1737년(영조 13)에 중창하였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며,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안양문을 넘어서면 극락전에 이른다.
극락전 안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관음전은,
무설전 뒤의 한층 높은 언덕에 있다.
751년 김대성이 6칸으로 지었던 것을 1470년(성종 1)에 중수하였는데,
현재는 1973년의 복원 때 새로 조성한 관음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비로전은,
관음전 아래 서편에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해탈교를 지나,
청운교 앞에서 알레르기가 심한 일행과 헤어져,
나 혼자 불국사 이곳저곳을 찾아 사진을 찍고 옛 추억을 기억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 사진을 찍지 못한 곳은 틈틈이 다시 돌아와 찍어야만 했다.
극락전 금돼지상이나 현판 뒤 맷돼지도 몇 번인가 찾았다.
불국사를 나와,
아내가 추천한 여행지인,
드라마 동이 촬영지 월성과 석빙고를 보기 위해 출발했다.
월성과 석빙고는 주차장이 따로 없어 동궁과 월지 주차장을 이용했다.
월성과 석빙고는 주차장 건너편 언덕너머에 있다.
5) 월성과 석빙고(14:45~15:20)
경주 월성은,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의,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에 이른다.
월성은,
201년(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이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사용되었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드라마 동이의 촬영지이기도 한
월성이 자리한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경주의 풍경은,
비록 바람이 거세지만 저녁 무렵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석빙고 역시 이 언덕 아래에 자리해 있다.
석빙고는 보물 제66호이다.
영조 14년((1738)에 부윤 조명겸이,
목조의 빙고를 석조로 축조하였다가 4년 뒤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는 빙고 입구 이맛돌에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이라고,
새겨진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월성 북쪽의 둑을 잘라서,
남쪽에 입구를 내고 안으로 바닥을 경사지게 했으며 ,
바닥 중앙에 배수로를 만들어 물이 밖으로 빠지도록 했다.
내부는 동서로 홍예 5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 사이에 장대석을 걸쳐서 천장으로 삼았으며 북쪽 벽은 수직으로 쌓았다.
천장에는 배기공을 3곳에 두었는데,
지금의 배기공 위에 있는 석재는 근래의 수리 때 놓은 것이다.
출입구는 너비 201cm, 높이 178cm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영조 때 만든 석빙고가 여러 곳에 있으나 그중에서도 경주 석빙고가 가장 완벽하다.
6) 대릉원(15:35~16:10)-소화염전(소금빵, 16:15~17:06)-
경주동(저녁, 17:09~18:09)-경주역(18:40)
아마 경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경주 불국사와 대릉원의 고분군일 것이다
대릉원에 들어서면 무덤의 크기와 그 수에 놀라게 된다.
이곳의 대표적인 무덤은 미추왕릉과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일 것이다.
미추왕릉은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을 모신 곳이다.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신라 제13대 미추왕을 모신 곳이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천마총은
5~6세기경에 축조된 어느 왕의 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5~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 당시 금관을 비롯한 유물 11,50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나와서 천마총이다.
황남대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며,
북분(北墳)과 남분(南墳)으로 이루어진 쌍무덤이다.
발굴 때 북분에서는 금제 허리띠, 금관 등의 부장품이 나왔고,
남분에서는 유리제 병과 배, 금목걸이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금관은 국보 제191호,
금제 허리띠는 국보 제192호,
유리제 병 및 배는 국보 제193호, 금목걸이는 국보 제194호이다.
예전 여행 때 이미 둘러 본 일행을 황리단길 소금빵 맛집인,
소화염전에서 쉬게 하고 대릉원을 산책하듯 걸었다.
대릉원에 들어서자,
그릇을 업혀놓은 듯한 무덤들이 만든 곡선의 미가 돋보인다.
능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배롱나무가 그림자를 만들고 나는 그 곳으로 스며든다.
무덤 사이를 걸으면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황금색으로 그린 그림 한점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대릉원을 마지막으로,
2박 2일의 경주여행을 전부 마쳤다.
지금부터 황리단길에서 쉬고 있는 일행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딸을 경주역에 내려주고 강릉으로 출발해야 한다.
대릉원 쪽문을 통과해 황리단길로 향했다
오늘도 식사는 황리단길에서다.
아마 우리 딸은 황리단길 음식들이 입맛에 맞는가보다.
소화염전에서 나온 소금빵은 조그만 나무곽에 소금을 채운 그 위에 놓여있다.
하나는 쫄깃쫄깃하고 다른 하나는 바삭바삭하니 씹는 맛이 있다.
커피와 곁들여 먹는 맛이 또 일품이다.
마지막 저녁은,
일식으로 하기로 했다.
황리단길 골목에 자리한 일식집 경주동을 찾았다.
일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덮밥처럼 작은 공기에 채워진 다양한 생선회는,
의외로 한 숟가락에 불과해 먹기에도 편하고 그 맛도 좋다.
식사를 마치자 오후 6시,
차를 주차한 대릉원공영주차장으로 돌아가서,
경주역으로 딸을 데려주고 강릉으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경주역에 딸을 내려주고 강릉으로 가는 길은 시내를 통과하지 않아서 좋다.
18시 50분, 경주역을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니 22시 50분,
무사히 여행을 마쳤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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