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진겨울바다.
겨울바다는 오히려 여름바다보다 더 푸르다.
겨울 배추는 전체적으로 거칠고 억세지만,
쌈을 싸먹으면 그 고소함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맛있듯이,
겨울바다는 손발이 오그라들고 몸을 움츠리게 하지만 텅 빈 짙푸른 바다를 보는 느낌은 너무나 좋다.
어떤 사람은 추억을 찾아오고, 또 어떤 사람은 추억을 쌓으러 온다.
어떤 사람은 도시의 소음이 싫어, 번잡함이 싫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오기도 한다.
겨울 바다는 왠지 사랑하고는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둘보다는 혼자가 어울리고, 씨끄러움 보다는 고요한 적막이 어울리고, 동적이라기 보다는 정적이다.
그리고 따뜻함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간절하고, 인연의 그 누군가를 그립게 한다.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말없이 눈을 감게 하고, 가만히 있어도 외투깃을 여미게 한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겨울 바다에 나가보면 유난히 싱그럽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내게 있어 겨울바다는 쓸쓸함보다 가슴 탁 트인 시원함을 준다.
더운 여름날에는 그렇게 멀게 보이던 수평선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듯하고,
마치 푸른 하늘 속에서 내가 태초 어머니 품 속에서 유영하는 느낌이 들어 너무나 행복하다.
그리고 겨울바다는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어서 좋다.
아무리 큰 소리를 지르고 우당탕 뛰어다녀도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 없다.
파도가 세상의 더러움을 지우듯이 깨끗하게 쓸고 간 자리에 남은 내 발자국만이 남은 기분은,
왠지 내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아 너무나 좋다.
거기에 파도라도 치면 얼마나 좋을까?
파도치는 날 바다에 나가 그 소란스러움을,
그 아우성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파도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바닷물이 바위에 철썩거리는 파도 속으로 무지개가 피어나는 모습은 황홀함 그 자체다.
그리고 거의 모든 모래 벌을 삼켰다 떠난 자리에 남은 포말은,
마치 드넓은 초원에 눈이 내린 듯하고,
수평선 끝자락에서 해안까지 하얗게 일렁이며 밀려오는 파도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겨울바다는 차가운 듯하면서도 다소 쓸쓸한 감정의 여백을 느끼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은 듯한 푸른빛은 흐트러진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바다는 사람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바닷가에서 듣는 파도와 갈매기 소리도 사람의 추억에 따라 우울하거나 정겹게 들리게 된다.
낮과 밤의 바다가 다르고, 계절마다의 바다가 다르고, 날씨에 따라 다르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더없이 평온하다가도 바람이 불면 큰소리로 울기도하고 거칠게 화를 내기도 한다.
내게 있어 바다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다.
해안의 기암절벽과 같은 풍경을 보면,
세월의 힘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대자연은 무언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밀려왔다 밀려가는 셀 수조차 없는 반복을 통해,
깎이고 파여 우리 눈에 다가왔다가 또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내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만큼은 정성을 다해야 한다.
겨울바다에 서면 난 언제나 가슴이 벅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여러번 보면 실증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바다는 변화를 품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저 좋다.
지금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이 겨울바다처럼,
그 푸르름을 안으로 삭히고 삭혀 청명한 공기로 변해가듯이 싱그러움을 가득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