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 서 장/순 수

터전은 뿌리와 같다.

소우(小愚) 2010. 6. 4. 08:41

 

 

 

 

◐터전◑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은 만양골 마지막 집이였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도 이곳이다.

 

만양골을 들어서면,

그런대로 넓게 자리한 밭과 산들이 곱게 둘러싼 집이 나오는데,

이 곳이 바로 우리가 살던 고향집이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이 골에서 만양이라는 거금을 벌어 나갔다 해서,

만양골이라 붙여졌다 하는데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버지 3형제가,

이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에,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이 곳이 바로 터전일 것이다.

 

형님들이,

다 외지로 나가고 나 역시 떠나온 뒤,

군부대 훈련장으로 국가에 수용되어 아버지마저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이 곳을 떠나면서,

이미 스스로의 생에 대한 애착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목숨과 같은 터전을 잃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었을까?

 

비록,

같은 지역에 거처를 정하고 이사했지만,

터전을 잃은 허탈함과 자신에 대한 원망이 쌓여 병이 되었으리라.

나 역시도 이 곳을 터전 삼아 뿌리를 내리고 싶었지만,

아들로서 막내라는 한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터전은 일반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의미하지만 삶의 근거지라 할 수 있다.

삶의 근거지는 곧 무슨 일을 하기 위한 기초며 토대인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성인으로 자라면서,

점차 육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교육과 경험을 통해 자아가 성장하듯이,

터전은 바로 성장을 위한 씨앗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터전은,

단지 집을 짓기 위한 땅이 아니라,

<나>란 자기를 성장시키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터전은 단순히 양식을 얻고 지친 몸을 쉬어가는 장소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묻고, 육신을 묻고, 인생을 묻어야 하는 은혜로운 대지다.

 

눈 감아도 떠오르는,

동심의 그리움처럼 나의 마음이 녹아내린 곳,

자유와, 그리움과, 사랑이 여름밤 메밀밭에 부서져 내리는 달빛처럼,

추억으로 아스라이 남아있는 곳,

 

아버지의 사랑 같은 커다란 나무와,

올망졸망 쌓아 만든 화단에서 자란 붉은 봉숭아로 물드린,

손톱 언저리에 아직도 그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곳,

눈 감아도 떠오르고, 생각만 해도 향기가 묻어나는 곳,

이 곳이 바로 우리의 터전이다.

 

뿌리가 없이,

커다란 나무로 자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전은 바로 우리의 뿌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가 나를 지켜주는 뿌리였다면,

나 역시 나의 아이들을 지켜주는 뿌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터전은 이와 같이 대를 이어 계승되어야 더 굳건한 뿌리와,

더 무성한 잎과, 더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터전이,

아버지의 터전이 되고,

그 터전이 나의 터전이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나와 나의 자식에게,

튼튼한 뿌리가 될 수 있는 우리들만의 터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 낙 서 장 > 순 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이가 들수록 고집을 버려야 한다.  (0) 2010.06.07
사람은 저 홀로 서지 않는다.  (0) 2010.06.05
남겨진 자의 소망  (0) 2010.06.02
그대여서 행복합니다.  (0) 2010.05.29
대화  (0) 2010.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