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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이
이곳 강릉에 자리 잡게 된 계기는 역사적인 사건과 닿아 있다.
김주원은 1,200여 년 전 신라 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으로 당시 시중(현,국무총리) 자리에 있었는데,,
선덕왕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조정 중신들에 의해 임금을 추대되었다.
하지만 당시 김주원은,
200여리 떨어진 외곽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궁궐로 향하던 중,
때마침 내린 홍수로 불어난 하천을 건널 수 없어 입궐을 못하게 되자,
당시 그의 의형제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경신(원성왕)이 화백회의를 적격 장악, 욍위에 오른다.
비가 그친 후 입궐한 김주원에게 원성왕이 마지못해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임금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내가 큰 비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라며,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이 곳 명주에 정착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당시 따라온 가신 3,000 중 측근인 최, 박, 함, 곽씨 모두가 명주를 본관으로 삼음으로써,
그들에 의해 이 지역의 5대 토착성씨가 탄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는 각 문중의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이들 성씨 모두 고려시대의 인물을 시조로 삼고 있다.
김주원의 탄생설화는 허균의<발연사고적기>에 나오는데 자못 흥미롭다.
즉, 김주원의 아버지 김유정과 그의 어머니 연화부인 박씨의 러브스토리인 <신어 이야기>다.
당시 화랑이었던 김유정은,
이 곳 명주에 유휴관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무술연마를 위해 주변 산천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연화부인을 만나 사랑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져 갈 무렵, 유휴관 임기가 만료된
유정의 “곧 기별하겠다.”란 약속을 뒤로한 채, 서라벌로 돌아가 서로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사연을 알지 못하는 그녀의 부모는 시집보낼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소식 없음을 답답해하던 그녀는,
유정과 함께 거닐던 연못가에 찾아가 그 곳에 자라던 금빛 잉어에게 자신의 심경을 하소연한다.
인어가 이상하리만치 알아듣자 그녀는 옷소매를 뜯어,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순간 당신 이외의 사람과는 결혼 할 수 없으니,
이 달 보름까지 안 오시면 자진할 수밖에 없다.” 란 내용의 편지를 써 잉어의 입에 넣고 큰 냇가에 놓아주었다.
며칠 후 서라벌에서 정무를 보던 김유정에게 부하가 안줏감으로 커다란 금빛 잉어를 잡아왔는데,
그 잉어가 무엇인가를 토해냈다.
마침내 연화부인의 편지를 본 유정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지난 일에 대한 죄책감과 연모의 정으로,
명주로 달려가 혼인을 해 낳은 첫아이가 바로 김주원이다.
그 후 후손들은 양어지 인근에 정자를 짓고,
김유정의 화랑 이름인 무월랑과 연화에서 한 자씩을 따와 월화정(月花亭)이라 했으며,
현재 월화라는 명칭은 강릉 김씨 종친회 화관을 월화회관으로, 월화 예식장으로 전승되고 있다.
그의 명주군왕릉은 현재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 홍인희의 정철도 몰랐던 21세기 관동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