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별이 눈을 뜨는 청명한 밤이 오면,
개울물이 흐르던 산골짜기에 피어오르던 모닥불 너머,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잠에 겨운 별 하나가 어깨에 기대어 온다.
피곤함에 지쳐버린 얼굴들이 스러져, 불꽃 뒤로 삶의 여백을 채우고서야 비로소...
하얀 억새가 바람에 날리는 논둑길에 나섰다.
검은 장막사이로 그 언제가의 추억 같은 바람이 불어오고,
터벅터벅 걷는 걸음조차, 삐거덕거리는 육체의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전, 그리 흔하디흔하게 울던 귀뚜라미 울음소리마저 끊어진 밤이 되고서야 비로소...
두 눈을 감고 하늘을 봐도 마음은 그곳에 있다.
흐드러진 꽃잎 같은 별빛들이, 비처럼 금방이라도 소란스럽게 내릴 듯하고,
달빛이 만든 침대에 어린 시절 여름날의 사랑이 누워있다.
오늘 가로등 희미한 논둑길을, 그림자를 거느린 채 홀로 걸어야 비로소...
시간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나 그리움은 언제나 그렇다.
아쉬움이 남고 미련이 남아야 비로소, 온전히 나를 바라볼 수 있음은,
이 또한 내가 만든, 내 운명의 편린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