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아픔 중,
가장 큰 아품은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하다 헤어졌더라도 자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쉽게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예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면
더 간절히 그리워하게 되고,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있는 사랑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아프고 슬픈 기억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그저 행복한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쩔 수없이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겨진 사랑은,
어쩌면 이별이라고 말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 부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한마디로 부부란 장맛과 같다고 정의하고 싶다.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더하는 장맛과 같이 부부 역시,
오래도록 함께 살아봐야 서로의 속 깊은 정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경험이 쌓여 지혜가 자라듯이,
부부 역시도 고난을 함께 극복하면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서로에게 스며들어 이해의 폭도 깊어지게 된다.
무엇을 바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다가가 서로를 지키는 울이 되어 주게 되는,
부부간의 따뜻한 마음은 사실 젊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부부는,
사랑하여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함께 더불어 사는 동안에 얻어지는 정이 사랑보다 오히려 더욱 중요하다.
사로가 서로를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일련의 행동이,
바로 부부가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이다.
혼자서 하기보다,
더불어 사는 것이 가정이요 가족이다.
사랑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 초에는 서로 이런저런 배려 없이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줘야,
진정 사랑받는다고 착각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름다운 새소리도,
잠을 자고 싶을 때는 단지 소음일 뿐이듯,
나만을 위해주는 사랑도 내가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육체적이 욕구가 강한 결혼 초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표현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산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 욕망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오히려 더 큰 사랑이었음을 알게 될 때는,
아마 중년의 나이쯤 살아봐야 가능하지 않나 싶다.
살아온 세월이,
한스럽고 상처가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나름대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진심으로 상대방이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 준,
마음 속 깊은 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난 오히려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
젊었을 때보다 귀가시간도 빠르고, 집에서도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한다.
그것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가 돌아오는 남은 시간동안,
편안하게 드라마나 영화 혹은 7080 음악들을 함께 들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아내라기보다 편한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들 때도 많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도,
가급적 조심스럽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배려를 하면,
결국 그 배려만큼의 사랑이 내게 온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결혼 초에는 이런 따뜻한 마음들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욕심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
처음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모정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누가 뭐라 해도,
부부만큼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서로의 입장에 서는 같은 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금만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결코 믿음을 배신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남의 상처보다,
내마음 속 상처가 더 크고 깊게 나기 마련이다.
나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바라보지 않고,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아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