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알아주기만 해도
◇◇ 자식이 걸린 병은 세월과 더불어 부모의 가슴속에서도 자란다.
요즘 내 주변에는 부모의 부양으로 속 끓는 사람들이 많다.
비단 지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명연장에 따른 경제적인 부담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형제들은 물론 출가한 자매들까지 서로 십시일반하지 않으면 모시기가 어려울 정도다.
행여 마음이 있어도 일정부분 함께하려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그만큼 서로에게 이해가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부양은 바로 현실이기에 그렇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아내나 남편이 동의하지 않아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모시지 못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일이 생겨도,
그 순간 함께하지 못하기에 마치 죄를 짓는 듯 마음이 편치 않다.
모시는 사람은 서로간의 오해나 갈등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모사지 못하는 현실의 벽에 힘겨워한다.
어린 시절 슈퍼맨이었던 부모가 어느새 늙고 병들어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요즘 난 어머님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저리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어김없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염려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면,
그저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서 가급적 먼저 전화 드리고 싶은데,
일이 바빠 등한시하면 어느 사이엔가 전화가 걸려온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면,
왜 나는 행복하기보다는 슬픔을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죄스러움이 먼저 나를 대신하는 것일 게다.
젊었을 때는 대부분 자신이 최고인줄 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구속이 될 즈음,
부모에 대한 사랑과 부양의 의무 역시 절실하게 된다.
알다시피 사람은 누구나,
현실로 다가오기 전에는 그 일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니까 말이다.
현실을 핑계로 불효를 저지르는 그 순간들이 쌓여갈수록,
가슴 한쪽은 더욱더 저려올 수밖에 없다.
성공한 자식이 부모에게 잘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어린 시절 부모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노력과 정성을 다했는지 잊어버리고,
저마다 제가 잘나 성공한 줄 안다.
자신의 노력을 더 많이 강조하고 부각시켜야,
왠지 자신의 위신이 선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가난한 함께 사는 자식보다,
여유가 있는 자식이 돈으로 행세해도 부모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식구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밥을 함께 먹는 자식이 최고의 효자인 것이다.
그래서 음과 양으로 표시 안나게 하는 효도는,
어쩌면 희생이란 또다른 이름인지도모른다.
자식이 커가는 모습에서,
지난 날 나를 보살펴주던 부모를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보답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와,
아낌없는 사랑에 대해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구속이 될 즈음,
부모는 점차 우선순위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이가 들어,
반대입장에 처하면 왠지 모르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모신다는 것은 삶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나 기쁨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삶을 같이 함으로써 서로에게 고운 정 미운 정이 함께 들어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책임감이나 의무가 아닌, 마치 습관처럼 서로를 향해 관심과 사람이 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픔이고 사랑이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다.
그래서 흔히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그 자식은 부모의 가슴에 묻힌다.>라고 한다.
물론 말썽부릴 때는 속상하고 보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저 자신보다 우선시 여긴다.
그러나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자식의 마음이 부모의 사랑을 따라갈 수는 없다.
부모는 마음을 알아주기만 해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