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 서 장/순 수

이젠 이별에 당당해지고 싶습니다.

소우(小愚) 2017. 1. 6. 15:22

 

이별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을까요?

평생이 가도 못 잊을 이별이 있듯이,

하루 빨리 떠났으면 하는 이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있을 것이고,

언제 헤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별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별은,

추억처럼 누군가에 대한 기억들이 남아 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이별이라 할 것입니다.

그저 잠시 함께 있다 헤어졌다고 그것을 이별이 되진 않겠지요.

 

점차 이별하는 것들이 많아져 갑니다.

죽음으로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을 보면서 요즘은 왠지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막연하게 그립고 곁에 있으면 좋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커져갑니다.

예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쓸쓸함이 나를 외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내 삶을 지켜주었던 사람들이 떠나간 빈자리가,

겨울초입의 나목인양 춥고 가슴이 시립니다.

 

마음이 멀어짐은,

원망과 미움과 질투하는 마음이 앞서서입니다.

은연중 자신도 모르게 이해타산을 저울질하게 되고,

공을 탐하게 되며, 정의 크기를 계산하게 된 탓입니다.

하루하루 늘 경계하고 살지만, 원래 자라온 환경이나 성격이 모나서인지 채워지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주변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늘 가까이 있으려고 발버둥쳐도 말입니다.

 

어쩌면,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을 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이기심으로 도움과 사랑을 애써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 도요.

이처럼 이별은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떠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흔히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꿈꾸지만 막상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순간뿐임을 우린 잊고 살아갑니다.

오늘 단 하루도 마음대로 살지 못하면서 그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이별을 알 때는,

죽음을 경험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산 사람과의 이별은 언젠가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나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이별로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없음을 절감할 때의 그 비통함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뒤,

문득 혼자 남겨졌음을 깨달을 때의 아픔 역시도 그렇습니다.

이렇듯 이별은 누구에게나 고통입니다.

 

사람은,

바람과 같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맞게 고치려하기보다는,

스스로 바람에 적응하고 맞춰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변함없이 한결같은 것은 나의 마음이어야지 상대방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아닌 상대여야 합니다.

 

함께 일을 해보지 않으면,

무엇이 모자라고 부족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함께 같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이 왜 내게 소중한지 알지 못합니다.

함께한다는 감정을 모르면 이별 역시 의미를 담지 못합니다.

낙엽이 떨어져 거름이 되는 것처럼,

죽은 것은 죽어서 산 것을 살리고, 산 것은 죽은 것을 이어서 삽니다.

인연이란 이와 마찬가지로 헤어진 사람은 함께 했던 기억으로 면면히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진정으로 웃고 눈물 흘리는 순간이 사라져 갑니다.

사람들과의 희로애락에 눈물 흘리기보다는,

TV 주말드라마를 보면서 더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순간,

죽음조차 익숙해지고 이별조차 당연해질 때, 

무엇이 행복한지 조차 잘 느끼지 못합니다.

바라고 기대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앞서,

포기하는 순간이 더 많아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이젠 이별에 당당해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