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속의 트로트
난 요즘 트로트를 즐겨 듣는다.
예전에는 사실 난 트로트보다는 발라드를 더 좋아했다.
발라드가 사랑에 대한 추억이나 감성적인 나에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트로트 선율이 가슴에 남아 가끔은 일상에서 흥얼거리곤 한다.
굳이 외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노래방에 가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서 좋다.
어린시절 농기구를 벼리기 위해,
진부장를 다녀오시면서 드신 막걸리에 얼큰해진 아버지께서,
어둑어둑해진 시골길을 걸으며 부르시던,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흘러가라 우리는 전진한다./
라는 가사의 <전우여 잘 자라.>라는 노래도 생각나고,
봄나물 뜯으면 부르던 우리 누님의 18번 곡 <동숙의 노래>나,
기념일이면 자식들의 강요에 민요풍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억지로 부르시던 어머님의 모습도 그립다.
이처럼 트로트는 송대관의 <네박자>노래가사처럼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삶을 쉬어갈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삶이란 시간은 멈춤 없이 언제나 흘러가기 때문이다.
잠을 자고, 노래를 부르고, 운동을 하거나 거리를 산책하는,
이런 휴식의 시간도 결국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짬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재충전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 이런 재충전에 가장 필요하고 어울리는 것이 바로 트로트가 주는 감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로트는,
단순히 기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같이 품고 있다.
소유하지 않아도 좋을 사랑은 없다. 그건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기변명이자 구실일 뿐이다.
그렇기에 사랑이나 이별사연 한 줄 없는 인생의 일기장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품안에 들어왔다 떠나간 것, 애당초 품안에 조차 담지 못했던 것들이,
저마다 애환의 노랫말이 되어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만 특별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입으로 가슴으로 자연스럽게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트로트의 매력은 삶의 위로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미움과 원망을 비워내고 비워내는 정화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
혼자면 혼자, 여럿이면 여럿이,
슬프면 슬픔으로, 기쁘면 기쁨으로,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정서를 담고 있는 노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트로트 메들리를 따라 부르다보면 절로 신명나서 언제 화가 났었는지도 잊어버린다.
게다가 요즘은 노래방기기가 있어 가사를 외우지 않아도 부를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가?
사실 내 노래실력은 음치에다 박치다.
익숙하지 않은 곡일수록 음정박자는 고사하고, 남이 부를 때 따라 부르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내 스스로 어색할 정도의 노래실력이지만 그래도 트로트를 부를 때면 그런대로 따라 부른다.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 그리고 한국인의 정서에 어울리는 감정에 익숙해서다.
그래서인지 난 오늘도 일상의 여백마다 트로트와 함께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