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도리
가족이나 친구가 힘들 때 함께 해주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요즘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그렇게 행동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대부분은 혹여 가족이나 친구중에, 그런 사람이 생겨 자신의 부담으로 올까봐 노심초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으로가 아닌 돈이나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만 가능하니까 말이다.
사회적 도리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후회하지 않을 정도가 적당하다.
각종 경조사나 모임의 찬조금이나 기부금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에 얼마나 받았었는지 또는 나의 경조사에 참석했는지에 대한 여부보다,
현재의 나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된다.
경조란 상부상조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이 옳다.
또한 경조사는 금전적인 도움도 필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람의 실질적인 도움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친구 부친 장례식에 다녀왔다.
고향친구이지만 서로 만남이 없다보니 마음 역시 거리가 존재했던가 보다.
하지만 지금도 동창회에서 모임 때마다 만나던 터라 ,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자 예전 그 친구와 함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부터 마음으로나 친구와 슬픔을 같이 나누기 위해 빈소를 찾았다.
하지만 발인은 출근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관계로 다른 친구로부터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이가 들면,
누가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 할 사회적인 도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너 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 경조에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꼭 이런 일이 닥치면 친구 중 몇몇은 꼭 남의 사정은 배려하지 않고,
가슴에 못을 박는 모진 말을 하는 친구가 있다.
자기가 그 사람의 인생을 다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그 사람이 모멸감이 들 정도로 자존심을 구기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 모두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는 충고이지만, 막상 당하는 친구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사회에서의 인연은 대부분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뜻한 인간미에 반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능력을 선호해서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계산적이며,
이익에 의해 형성된 단기적 인연이지만,
친구라는 이름을 같이 쓰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다.
때때로 하고 싶은 말이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친구의 사정때문이라면 이해하고 넘길 수 있어야 그 인연은 지속된다.
아무리 친구사이라지만,
욕을 먹으면서까지 그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없다.
부부싸움은 남이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는 것처럼,
친구라고 해서 자기마음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기를 <친구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을까?>라고들 한다.
그러나 친한 것과 말을 막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편한 것과 예의 없는 것은 다르다.
친구는 시간과 시대를 같이 한 사람으로 믿음이 전제된 사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친구를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이미 친구라는 이름을 잊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저 아느 사람일 뿐,
친구라는 이름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
친인척이나 친구나 선배나,
아니면 직장동료 할 것 없이 모두 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만들어진 인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도움을 받고 신세를 졌는지 다른 사람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다 안다.
물론 제3자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비춰질 수 있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가정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꾸리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영역이 있고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고보다는 이해하는 마음이 더 먼저가 되어야 한다.
사회저 도리는,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을 나눠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