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고 추억
◆◆ 사랑, 그리고 추억
그녀의 자취방이 있던 집 주변에는,
겨울날에 내리는 함박눈 같은 사과 꽃이 피었었다.
봄이 되어,
사과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길을 따라 걸으면, 흡사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몽롱한 느낌에 흠뻑 취했고,
사과밭을 경계로 심어진 탱자나무에 노란 탱자가 익을 때면, 탱자나무의 그 가시 울타리는 그녀와 나의 경계였다.
사과 과수원이 있는 주변 울창한 송림을 따라 그녀를 만나려 가는 내내 가슴 가득 밀려오는 그녀에 대한 생각과 간절한 그리움들은,
중년이 된 지금도 가슴 아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랑이란 마음이 대신 부르던 이름,
그녀는 남들이 우러러 볼 정도로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내게 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취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나를 더 많이 챙기고 배려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늘 꿈속에서처럼 함께 있는 시간동안은 나는 오직 그녀에게 속한 존재에 불과했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항상 더 다가가 머무르고 싶었던 사랑,
그러기에 미칠 듯 그리워지고 그리워져서 미쳐 버리는 사랑,
지난 시간 뒤에 남겨진 사람의 독백처럼 그 사람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사랑,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자신의 곁을 떠나야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향기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은 촛불도 양초가 없으면 힘없이 사라지듯이 사랑의 열정도 시간을 이기지는 못한다.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사랑이 주는 그 강열한 느낌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한계지우고 싶지 않아 영원성을 부여하는지도 모른다.
오직 보고 싶다는 일념하나도 어두운 밤길을 걸어 창문을 넘어 몰래 만나던 사랑이 멀어진 것은 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일 것이다.
그만큼 사랑의 크기가 깊지 않음이 근본적인 원인일 터이지만 그만큼 환경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서로에게 구속이 되고 참견이 될지언정 지근거리에서 한결같이 속삭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만큼 체면이나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그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 한다.
사랑은 그저 간절히 원하는 마음 하나가 필요할 뿐이다.
동해안을 따라 7번 국도를 타고 속초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면 삼팔선 휴게소를 지나 기사문리라는 작은 어촌 마을이 보인다.
지금은 등대도 항만도 새롭게 단장되었지만 80년대 초만 해도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다.
반짝거리는 모래발이 고운 항 포구에 작은 어선이 그림처럼 밧줄에 메여있고,
갈매기가 한가롭게 바위에 앉아 날개를 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때문에 그녀도 나와 같이 가난했기에,
어렵게 대학을 보내준 부모의 뜻을 외면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도 늙어간 세월만큼이나 틈틈이 바람이 전해준 사랑의 아픔을 전해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지만,
그것은 대답 없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젠 잊어줘요.”
어렵게 물어물어 그녀가 머무는 곳은 간이역 주변에서 건 전화에서 들려오는 울음 섞인 그 목소리는 마지막 이별의 통보였다.
목적지마저 상실한 나는 열차가 끊어진 어둑해진 밤거리를 혼자 헤매고 다녔다.
넋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발걸음 따라 걷다보니 그 좁은 역 주변을 몇 바퀴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쏘다녔는지 모른다.
불빛이 가물거리는 간판 조명과 레온사인 불빛 사이, 어둠 속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덩그렇게 남겨졌다.
사랑의 아픔을 잊는 것은 바로 추억이다.
잊으려한다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그리워 그리워하면 언제부터인가 우습게도 자신도 모르게 옅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했다면 가슴에 묻어두지 말고, 가슴 한쪽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나와 같이 살아가면 그뿐이다.
사랑을 잃었다고 또 다른 내가 될 수 없듯이 말이다.
분명, 그녀는 내게 있어 하루라도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지만,
난 이렇게 버젓이 아무 일 없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음도 사람의 숙명일 것이다.
그렇다.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
지금도 마치 환청처럼 들려오는 그녀가 전해준 속삭임들에 대한 추억은,
그녀에게 준 나의 첫 입술과 같이 마지막 생을 함께 할 것이다.